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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최후의 전쟁. 정미 의병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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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헬창인생
댓글 2건 조회 27회 작성일 26-04-25 11:07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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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은 현재 포위되어 있다. 국정은 모조리 일본의 간섭을 받고 일·러 개전 이래 한.일 간에 체결된 국제조약과 이권에 관한 조약 등은 짐이 허락한 것이 아니다. 정부대신도 모두 일본의 지휘를 받고 있다. 외국인의 해고 및 공사 철퇴와 같은 것도 이는 짐의 진의가 아니라, 즉 일본의 강압에 의한 것이다. 만약 정부로부터 이에 관하여 지시하는 것이 있어도 결코 시행하지 말라. 이상 궁중으로부터 전보 발송.

-을사늑약 체결 직전인 1905년 10월 22일 주한일본공사관이 탐지한 고종의 밀서. 암호화되어 상하이로부터 세계 각국의 대한제국 공사관들에 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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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위 문제가 절정에 도달했음. .중략. 황제는 식사를 계속 하면서도 최대한으로 장시간을 양위에 반대해 싸우다가 마침내 일본의 대포가 대궐을 조준하고 있다는 위급한 호소에 굴복하고 말았음. 황제가 믿을만한 추종자들에게 실토하기를, 미국 및 러시아영사관을 피신처로 할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하면서 고종 황제는 최후에는 자살을 위해 아편을 입수하기 위한 여러 번의 노력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음. .후략.

-통감부문서 제3권,  [한국 주재 외신기자가 외국 신문사와 發·受信한 通牒 전보내용 보고 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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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전 황제가 한밤중에 대궐에 들어가 양위에 책임이 있는 내각대신 전원을 살해하도록 비밀리에 황실경비대에 명령한 음모가 이토 히로부미에게 보고되어 일본 군대가 대궐을 수비 중이라는 공식발표가 있었음. 상기 음모의 실현 가능성을 알리기 위해 11시에 이토 히로부미를 방문한 한국 군부대신과 법무대신은 즉각적인 도움을 간청했음. .후략

-통감부문서 제3권, [한국 주재 외신기자가 외국 신문사와 주고받은 전보내용 보고 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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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일본은 군대를 동원하여 대한제국 궁궐을 포위한 뒤 

총, 칼을 동원하여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게 됩니다. 

 

대한제국은 러일전쟁 직전 러시아와 군사 동맹을 논의했고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함경도 지역의 대한제국 진위대가  

고종의 명령으로 러, 일 전투에 참전까지 했습니다

이런 대한제국의 적대 행위를 모두 지켜 본 일본 입장에서 

대한제국 군대는 한반도 병탄을 단행하는데 큰 걸림돌이었죠 

 

1905년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점령한 일본은

즉시 대한제국군의 대대적인 군축을 단행합니다

 

우선 대한제국군 친위대 3000명을 해산 시켰고 

수도 방위를 책임지는 대한제국군 시위대 5천 명을 

병력을 절반인 2500명으로 감축하여 줄였습니다 

 

지방군 대한제국 진위대에 대한 군축도 이뤄집니다 

6개 연대 18개 대대18000명에 달하던 병력을 해산하고 

모두 축소시켜 2500명 수준으로 줄여버립니다. 

 

이 때문에 러일전쟁 직전까지 꾸준한 군비증강으로 

나름 2만이 넘는 병력을 모아왔던 대한제국군은 

수 천명 수준으로 크게 줄어 들게 됩니다. 

 

이후 고종 황제는 일본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여 

헤이그 밀사를 파견하며 저항했지만 

일본의 방해 공작으로 그 역시 실패했고 

한성에서 일본에 대한 시위가 격화 되는 와중에 

대한제국군이 종로 경찰서를 습격하는 사건도 벌어졌죠 

 

국망의 상황이 점차 가시화 되어갔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대한제국군 장교단은 군사를 일으켜

일본군을 급습한다는 계획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급기야 1907년 일본은 헤이그 사건의 책임을 물어서

대한제국 고종 활제를 강제 퇴위를 시키게 됩니다. 

 

고종이 조만간 일본으로 압송된다는 소문이 돌자 

이후 한성에 크게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당시 상황을 조선 통감부에서 이와 같이 보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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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19일 오후 한국 국무대신에 대한 경성의 인심은 한층 더 격앙되었으며, 특히 대한제국군 시위대는 매우 격분하여 같은 날 한밤중에 궁중에 난입하여 각 국무대신을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우는 등 형세가 극히 험악함.

그에 따라 사령관은 곧 우리 주둔군을 왕궁의 각 요소에 배치하고, 때에 따라 적절한 행동을 취하도록 명하였음. 그 후 우리 군대는 동 11시 58분 각각 배치를 완료하였음. 이상을 우선 급히 전보 함.

- 1907년 07월 20일자 통감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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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고종 황제는 대한제국군에게 밀지을 내려 

일본에 대항하여 대한제국군이 모두 봉기할 것을 명령합니다. 

 

이에 대한제국군은 시위 혼성여단 2연대 3대대의 주도로

경운궁으로 진격하여 고종황제의 신변을 확보 하고 

육군무관학교 사관 생도들은 전투를 위한 탄약을 확보하며 

평양 연대 부대가 궁궐과 각 관청 청사를 확보하기로 계획을 세웠죠

 

하지만 군사 봉기가 시행 되기한 20일 새벽 바로 직전.

군부 대신 이병무와 친일 내각에게 고종의 밀명은 간파 당했고 

즉시 친일 내각은 일본군에 이 사실을 알리게 됩니다. 

19일 밤 11시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 주둔 일본군을 출병시킵니다. 

 

20일 새벽 4시 즉 군사 봉기 바로 30분 직전에 

일본군 51연대는 경운궁에 도착해 기관총을 설치하였고 

대한제국군 여단을 거꾸로 전부 포위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대한제국군 고위 장교들은 모두 체포되었고 

밀명을 내린 고종황제은 연금 상태에 처하게 됩니다.  

이때 고종은 최후에 수단으로 자결하기 위해 

몸에 지니고 있던 아편을 모두 압수 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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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육군훈련원 강제 해산

 

이 사건으로 일본은 대한제국군을 즉시 해산하기로 결정합니다. 

 

우선 친일 내각을 동원하여 군 장병에게 금족령을 내린 뒤

대한제국군의 중화기와 탄약이 보관 된 용산병기창을 

일본군이 급습하여 모두 장악하였습니다. 

이때 빼앗은 탄약만 600만 발이 넘었다고 전합니다.  

 

이어 병약한 황제 순종을 압박하여 

대한제국군의 공식 해산을 명령하게 했습니다.

 

일본은 이때 8월 1일 시위대 해산을 시작으로 

9월 3일까지 진위대까지 순차적으로 해산을 계획 합니다

가장 먼저 시위대 해산을 시급히 한 이유는 

이들이 수도인 한성에 주둔하는 정규군 군대이면서  

직전에 무장 봉기를 시도했을 정도로 위험했기 때문이죠   

이들은 해산 소식을 듣는 순간 저항이 필연적임으로 

가장 중요하게 해산 시켜야 하는 부대였습니다. 

 

1907년 8월 1일 아침 7시에 일본의 지시로 

서울 내 모든 대한제국군 지휘관들을 소집하였고 

이들이 모인자리에서 친일파 군부대신 이병무가 

순종 황제의 조서를 낭독했습니다. 

 

대한제국군을 해산한다는 내용입니다. 

 

이어 장병들에게는 군대 해산이 아니라 

일시적인 부대 해산일 뿐이라고 기만하는 내용을 전해

대한제국군의 집단 저항을 무마 시켜 보려 시도합니다  

 

하지만 그게 통할리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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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적으로는 황제의 칙령이지만 

일본에 의한 강제 된 군대 해산 명령입니다. 

 

대한제국군 시위대 1연대장 박승령 참령은

군대 해산 명령을 받을 수 없다며 권총으로 자결 하게 됩니다 

 

대한제국군 박승령 참령의 유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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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은 국가를 위하여 경비함이 직책이어늘

이제 외국이 침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홀연히 군대를 해산하니

이는 황제의 뜻이 아니요, 적신(賊臣)이 황명(皇命)을 위조함이니

내 죽을지언정 명(命)을 받을 수 없다.

군인이 능히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가 능히 충성을 다하지 못하면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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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해산 소식에 조용히 무기를 반납하던 장병들은  

연대장의 자결 소식을 듣자 즉각 격분해서 봉기했습니다.  

박승령 참령의 권총 자결이 신호탄이 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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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군 1연대 1대대 병사들이 총을 쏘며 저항을 시작하자 

이미 무기를 반납한 2연대 1대대 병사들도 즉시 무기고를 습격

다시 개인 화기를 찾아 무장하고 전투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렇게 대한제국군 2개 대대와 추가로 가세한 300여명이 

숭례문에서 서소문에 걸쳐서 일본군과 교전을 시작하니 

이를 남대문 전투라고 부릅니다.  

한류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도 해당 전투가 나오죠 

 

이때 대한제국군은 전력은 장교 사병 포함 

약 1.244명 + 300여명 수준의 병력이었으며

무장은 대부분 개인화기 소총 병입니다  

반면 일본은 대한제국군의 저항을 예상했기에

미리 중화기와 군대를 주둔하여 대비하고 있었죠 

남대문 문루에 진지를 세워 기관총을 설치하였고 

일본 군은 준비한 1,100명의 병력으로 교전에 참가 합니다  

 

초반 대한제국군은 무서운 기세로 사격 하며 

일본군을 몰아 붙이며 진격하였으나 

곧 남대문 성루에서 아래로 사격 하는 기관총과 

일본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점차 밀리게 됩니다. 

 

대한제국군 병력들은 주둔 병영을 진지로 삼아 

계속 방어전으로 교전을 이어갔지만 

이미 용산 병기창의 중화기를 모두 빼앗기고

탄약도 부족한 상태에서 치뤄 진 전투였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군 장병들은 

일본군의 3차에 걸친 돌격을 저지하면서 분투했지만 

결국 일본군이 공병대를 동원해서 폭약으로 

진지를 부시고 일본군이 진영에 난입하게 되자 

2연대가 전투에서 패하며 병영을 내주었고  

홀로 남겨진 1연대도 최후까지 버티며 저항했지만 

탄약이 모두 소진되어 진영을 함락 당합니다. 

 

그렇게 수도 한성에서 벌어진 첫 전투에서 

대한제국군은 패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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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때의 패전은 새로운 전쟁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정미의병 전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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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 전투에서 살아 남은 대한제국군 시위대 850명은

한성을 빠져나와서 곧바로 의병에 가담하였습니다. 

더불어 지방에 있던 대한제국군 진위대가 소식을 듣고 

모두 의병으로 가담하여 전쟁에 돌입한 것이죠 

 

전국 지방에 주둔하고 있던 대한제국군 소속 

원주진위대, 여주 파견대, 강화 분기대, 진주 분견대 

안동 분견대, 홍주 분견대 등이 무기고를 털어 

전국 각지에서 의병과 함께 일본군과 교전했습니다 

 

정미의병이 이전 의병들과 다른 점은

해산 된 대한제국군이 본격 가담하여 참가했기 때문에  

병력의 수준과 장비가 크게 개선되었단 것입니다 

 

1907년 11월 정미 의병들은 산개전투를 멈추고 

흩어진 병력을 통합하여 싸우기로 결정합니다 

지금의 경기도 구리시에 모든 병력이 총 집결하였죠 

 

교과서에서 배우는 13도 창의군입니다. 

이때 약 1만 명 정도의 병력이 집결하였는데  

이 중 대한제국군이 약 3천명이었습니다. 

 

이어 정미 의병연합군은 대의 명분을 위해서

각각의 외국 공사관에 격문을 보내 

국제법상 합법적인 교전권임을 주장했죠 

그 마음이 뭔지 충분히 이해는 되지만 

절대 해선 안되는 짓이었습니다 

 

의병 전쟁에 아무리 대한제국군이 합류했다지만 

일본군과 비교하면 지극히 열세인 병력들입니다

수도 한성에서 벌어진 전투만 생각해 보아도  

당연히 일본군과 정면으로 붙어서 승산이 없습니다. 

 

일본 조차도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개전 하며 

단 한번 미리 선전포고를 한 바가 없습니다 

모두 기습 선제 공격하여 승기를 잡은 후에 개전 했죠 

 

근데 정비 의병 연합군은 대병력으로 한성을 공격한다고 

공개적으로 사전에 미리 선포한 것이니 

사실상 일본군에게 군사 작전을 노출한 것입니다. 

당연히 일본군은 중화기와 대포를 동원해서 

한성의 수비를 강화하고 철저히 대비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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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도 창의군 허위가 이끄는 선발대 300명이 

한성 동쪽 30리에 진격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 장소가 지금의 동대문 근처 부근으로 

현재 동대문 신설동에 있는 도로 왕산로가 

이때 진격한 허위 대장의 호를 따서 지은 이름입니다 

 

그리고 일본군이 이미 철저하게 준비해 대비한   

중화기와 대포로 무장한 방어 병력을 보게 됩니다. 

허위의 병력이 교전을 시도 했지만 택도 없습니다 

300 정예병은 1차 진격에서 패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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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위의 선발대가 패전하고 돌아와 

일본군의 준비 태세를 본대에 알리게 됩니다. 

이제 클났죠 어떻할까요  

 

그리고 나서 

13도 창의군의 유명한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본격적인 2차 대규모 진격 작전을 앞두고   

총 사령관 이인영이 갑자기 선언합니다 

"우리 부모님 돌아가셨으니 3년 상을 치르기 위해 집에 가겠다" 

 

??????

 

총 사령관이 갑자기 떠나다니 뭔 소리인가? 

집결한 창의군 병력들의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졌고   

개뜬금 허무하게도 창의군 병력은 해산됩니다. 

 

조선의 유교 꼰대들을 비난하며 씹어 먹을 때  

늘 반찬으로 함께 오르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이인영은 진격하면 전멸이란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부모님 삼년상은 핑계일 뿐이고 

사실상 병력으로 일본군 진지를 돌파 할 수 없으니 

그저 전통 룰대로 탈룰라 시전 하며 퇴각한 것인데 

사람들이 억울하게 욕한 것일 수도 있죠 

 

그럼에도 후세 사람들이 

이인영을 제물로 삼아 지금도 욕하는 이유는 

이후의 전개가 너무 안타깝기 때문입니다. 

 

정미 의병은 다시 지방으로 흩어져 

일본에 저항을 지속했지만 점차 수세에 몰리고 

이번에는 일본이 대대적인 반격을 준비합니다. 

 

일본은 1909년 2월 한국 병탄을 최종 결정하고 

한반도에서 활동하고 있는 무장 저항 세력을 

완전히 토벌해서 일소하기로 결정 합니다. 

 

일본이 말하는 "남한 대토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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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선이 계속 밀리다 전투 3기에 이르면 정미의병군은 남해 도서 지역까지 밀려나 저항하게 됩니다 )

 

 

1907년부터 시작한 한반도의 정미 의병 전쟁은

일본군의 지속적인 공세 작전으로 수세에 몰리게 됩니다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에서 차례로 패전하면서

근거지 역시 남쪽으로 계속 후퇴하는 중이었습니다.  

밀리고 밀려서 호남 지역까지 이르게 된 것이죠 

 

호남 지역의 전투는1908년부터 더욱 거세 졌고 

1909년이 되면 전체 의병 전쟁의 절반 가량은

대부분 호남 지역에서 교전이 발생하게 됩니다. 

한때 한성 탈환까지 꿈 꿨던 정미 의병이 

이제 남쪽 끝까지 몰려 최후의 저항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은 이를 아주 잔인하게 진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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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작전이라기 보다는 학살에 가까웠습니다.

 

당시 일본군이 가장 중요시 한 것은 지원 차단입니다.

마을 단위로 수색하여 의병을 색출한 다음 

한번 넘어갔어도 불시에 다시 급습하여 색출했습니다 

그리고 흔적이 발견 되면 해당 마을 전체를 학살 도륙 했죠 

일본군의 군사 작전 기간에는 학살이 워낙 심하여 

호남 사람들은 집 밖으로 돌아 다니지를 못 했습니다. 

 

이어 일본은 정예 연대들을 대규모로 동원하고  

해군 구축함과 수색정까지 동원해서 

해안을 따라 체계적으로 진격하며 

정미 의병들을 공격하고 토벌했습니다.

 

당시 의병은 체포 후 재판 없이 총살 되었고 

지역의 주민들은 지원해 줬다는 이유로 학살 되었으며 

마을 전체와 사찰들도 무수히 소각 되었습니다.

 

당시 일본군이 작성한 남한토벌지에 따르면 

매 달에 천 명씩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록상 어떤 달은 2천명씩 죽이기도 하였고

일본군이 약 12,000명의 주민을 학살했단 기록도 있죠 

어떤 연대의 전투 기록에는 자신들의 연대가 죽인

조선인 숫자가 17,000명에 이른다고 기록합니다.

 

이 당시 희생된 의병장만 100명이 넘습니다

 

물론 정확한 사상자 숫자는 알 수 없습니다  

일본 제국 시절 만들어진 통계 자료와 군사 보고서는 

역사 자료로 신뢰성이 없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저 미루어 짐작만 할 뿐이죠  

 

1907년 대한제국군 해산으로 시작한 정미 의병은 

그렇게 호남 땅에서 모두 전멸 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준비를 마친 일본은 

1910년 한일병탄을 강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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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 의병 전쟁은 비극적으로 실패했지만 

 

지극히 당연하게도 

독립 전쟁은 결코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무장 독립군 세력은 

이제 한반도가 아닌 만주로 이전하여 

새로 무관 학교를 건립하여 장교를 길러냈고 

다시 병력과 군자금을 어렵게 모아서 

일본과 독립 전쟁에 돌입했습니다.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가 대표적이죠 

 

이들 무장 단체들은 1917년 이후 불어 닥친

이념의 갈등 속에서 나뉘어져 좌파와 우파로 활동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화민국의 지원을 받아 

정식으로 좌우가 모두 통합 된 독립군을 결성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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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휘 하에 좌우 합작으로 조직한 통합 독립군으로 총사령관은 우익의 지청천 장군, 부사령관은 좌익의 김원봉이 임명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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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일선전포고문 1941년 ) 

 

바로 "대한 광복군"입니다. 

 

대한 광복군의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으로 

대한제국 마지막 생도였습니다.

  

끝.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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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스터리딩님의 댓글

픽스터리딩 작성일

자꾸 일뽕들이 고종이 나라팔아먹었다 아무 저항도 안했다 이지랄하는데 계속 강압적으로 당하고있고 팔다리 다짤린거 사방팔방에 다알리고 몸비틀면서 버텼음 걍 조금만 알아봐도 그게 말이안되는 씹소리인걸 알면서 저러는건지 일부러 저러는건지 모르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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쌉가능님의 댓글

쌉가능 작성일

오히려 팔다리 다짤린거 사방팔방에 다 알린게
조선은 아무것도 못하는 국가라는걸 다른 열강에 알린꼴이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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